제목 | [혜초인도기행3] 남인도+스리랑카 13일(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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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12.31 |
작성자 | 박*훈 |
상품/지역 | 문화역사탐방인도/네팔/스리랑카 |
이번에 남인도를 갔다온 것으로 인도는 얼추 주마간산이나마 한번 둘러보기를 마무리한다. 골든 트라이앵글을 포함하는 북인도, 왕의 땅 라자스탄, 황량한 아름다움이라는 구자라트... 그리고 뭄바이, 아우랑가바드(석굴 2곳)를 포괄하는 서인도는 하도 넓어 2번에 걸쳐 다녀왔다. 요즘 분쟁이 더 심해지고 있는 분쟁지역 카슈미르(인도에서 갔으니, 잠무 카슈미르), 라다크를 향해 파키스탄 접경의 인도 최북단까지 다녀왔고 결국 남인도만 남겨 두게 되었는데... 이번에 소승불교 문화의 본산, 남인도와 스리랑카를 다녀 오게 되어 주마간산식 인도 완성이다. 사실 인도 동북부의 몇몇 도시(다즐링, 시킴)는 어쩔 수없이 못 가보게 되어 훗날로 미룬다. 이래야 인도를 또 가게 되는 명분?이 되겠지만... 인도는 볼수록 가볼수록 심지어 살아도 알 수없는 나라라고 한다. 암튼지 나를 계속 잡아끄는 참 매력적인 나라이다 북이면 북, 서면 서, 중앙이면 중앙, 남이면 남. 스리랑카 또한 여행지로서 대단한 나라임을 이번에 깨닫게 되었다. 자연 풍광, 유물 유적지, 조용한 해변, 수 많은 불교 사원이 있어서 그렇다. 2. 총론 이번 남인도, 스리랑카 여행에서 본 것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있다. 자연(해변), 사원(성당), 근현대, 궁전이 그것이다. 1) 자연(해변): 크리슈나 버터볼, 호튼고원(하이킹), 마리나해변, 칸야쿠마리해변, 코발람해변, 웰리가마해변 2) 사원(성당): 성 토마스성당, 아루주나 페난스(고행상), 파이브 라타스, 쇼어사원, 스리랑감 사원, 록 포트 사원, 미낙시 사원, 쿠마리 암만 사원, 담불라 석굴사원, 황금사원, 불치사, 강가라마야사원, 시마말라카사원 3) 근현대: 스리 오로빈도 아슈람, 비베카난다 기념관, 간디 만다팜, 나인 아치 브릿지, 리티판나, 더치 포트, 스리랑카국립박물관, 콜롬보포트지구 4) 궁전: 타루말라이 나약 궁전, 카파냐 궁전 5) 기타 유적지: 시기리야록(사자테라스, 18미인도, 카파냐궁전, 인공 연못, 분수), 플론나루와, 갈비하라, 쿼드랭글, 옛 궁궐터 3. 각론 다녀 온 곳 모두 눈에 선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인도 마두라이의 미낙시 사원과 스리랑카 시기리야 락이 지금도 계속 눈에 아른거린다. 그만큼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두 곳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남인도 마두라이의 미낙시 사원 뭄바이는 그동안 수차례 무장 테러단체의 공격으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급기야는 타지마할도 공격하겠다고까지 한 모양이다. 타지마할과 쌍벽을 이루는 볼거리인 스리미낙시 사원에 까지 그 여파가 미쳐서인지는 몰라도, 마두라이의 스리미낙시 사원은 그야말로 경비가 삼엄하다. 사원 내부는 물론이고 경내에 들어 갈 때부터 맨발에 모든 전자 제품은 반입금지일 뿐더러 금속탐지기 검사 및 몸 수색도 과도하게 한다. 물론 사원내 반입금지 품목 대상에 여행객에 필수품인 디카도 포함된다. 그래서 스리미낙시 사원의 사진은 경내 밖의 길거리에서 찍거나 4-5층 건물의 옥상에서 찍은 사진이 전부이다. 아쉽다. 나는 현지 가이드에 미낙시 사원 내부 사진을 부탁해 놓기는 하였다. 마두라이 미낙시 사원을 보고, 골목길로 해서 대로로 나와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를 않아, 도로변의 각종 자동차 수리점(아마 우리로 보면, 카센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주인장과 조수로 보이는 분이 사양을 하는데도 자꾸 의자를 권한다. 결국 의자에 앉았다. 하도 고마워 조그마한 감사 표시를 하려는데 사양을 한다. 당연한 일에 무슨 감사냐고 하는 것만 같았다. 남 인도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떴다. 북인도에는 타지마할, 남인도엔 스리미낙시 사원 북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 (왕)(1592~1666)이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 뭄타즈마할을 위하여 타지마할을 건축했다면, 이곳 남인도의 마두라이의 스리미낙시 사원은 샤자한 (왕)과 같은 시대에 왕을 지냈던 티루말라이 나약 왕(1623~1655)이 시바신과 미낙시의 사랑을 그리며 그들에게 봉헌하기 위해 건축했다고 한다. 그런데 샤자한 (왕)은 타지마할을 짓고 나서 안타깝게도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서 왕위를 박탈 당한다. 정사는 돌보지 않고 건축물에 쏟아 부은 돈이 엄청나게 많아 국가재정이 파탄을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가 하면 마두라이의 나약 왕 역시 거대한 궁전을 짓고 그의 손자 쵸카나따 나약 왕 대에 이르러 그가 지었던 나약 궁전이 원래 규모의 1/4만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권력은 참으로 무상한 것 같다. 과연 스리미낙시 사원은 북인도의 타지마할에 필적할 만한 건축물이다. 타지마할이 인도 사라센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라면, 스리미낙시 사원은 드라비다 힌두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샤자한 (왕) : 샤는 王이니 샤 자한이라면 (왕)이 없는 것이 맞고, 이름이 샤자한이라면 샤자한 왕이 맞다. 2) 스리랑카 시기리야 락 마르코 폴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스리랑카를 뽑았을 만큼 스리랑카는 흥미로운 곳이다. 스리랑카의 시기리야는 바위 왕궁으로 불리며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측면에서 이스라엘 마사다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싱할라 왕조에는 두 왕자가 있었다. 한 명은 천민 출신의 왕자(형), 또 한 명은 왕족 출신 왕자(동생). 왕권을 두고 싱할라 왕국은 다툼이 있었다. 정통성에서 뒤진 카샤파왕자는 부왕을 시해하고 카샤파 1세로 등극을 한다. 그리고 동생 목갈라나 왕자는 서둘러 가까운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 동생 목갈라나 왕자의 보복이 두려워 동생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은 수도승들이 거주하는 험난한 절벽 바위 꼭대기였다. 10여년이 흐르고 카샤파 1세는 동생과의 치열한 전투를 피할 수 없었는데 결국 수세에 몰린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오는 동생의 군대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존심을 지켰다. 카샤파 왕이 죽고 시기리야 요새는 목갈라나 왕자의 뜻에 의해 왕궁에서 수도승의 수도처로 원상 복귀 됐다. 권력욕, 패륜, 자존심이 어울어진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스토리가 있기에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려고 스리랑카로 몰려든다. 시기리야 락(스리랑카)의 벽화와 아잔타 석굴(서인도 아우랑가바드) 벽화 두 벽화 모두 서기 5세기경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졌다. 서양에서 프레스코화가 많이 그려졌던 르네상스시대 보다 많이 이르다. 시기리야 락 벽화는 '시기리야 숙녀들' '시기리야 미인도' 라 불린다. 당초 500명 정도의 압사라(춤추는 여신, 천상의 무희, 님프, 선녀)로 그려졌으나, 훼손돼 지금은 18명만 보인다. 하반신은 구름에 가려졌고 상반신은 벗고 있으며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다. 아잔타 벽화는 굽타 시대의 프레스코 화이고 주로 5세기 경에 조성되었는데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처를 묘사한 벽화는 광채가 나는 듯한 효과를 내기 위해 노란색과 녹색을 섞거나 번갈아 사용하였는데, 2,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그 영롱한 색감이 살아있어 찬사를 자아내게 한다. 연꽃을 든 보살은 섬세하면서도 육감적인 표현이 돋보이다. 한동안 역사에서 잊혀져서 긴 세월 동안 형성된 먼지층에 의해 잘 보존되어 선명한 색채를 유지되고 있었는데 어설프게 보수한답시고 벽화 위의 보호막 역활을 하던 먼지층을 다 없애버려 색채도 함께 희미해지는 등 현재는 벽화들의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현지 가이드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다. 돌만 보고 오느냐, 돌에 얽힌 스토리까지 얻어 오느냐는 바로 이 현지 가이드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4. 사진 설명 1) 토산품 가게의 옥상에서 찍은 미낙시사원 고푸람 2) 시기리야 락 벽화, 사진 촬영 금지라 나오면서 억지로 1장 3) 패륜을 저지르고는 못 사는 법, 이런 고공을 왕도 오갔겠지요.
평점
4.6점 / 5점
일정5
가이드3
이동수단5
숙박5
식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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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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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1.02 |
안녕하세요? 늘 혜초여행을 이용해 주시고 소중한 시간내어 상세한 상품평 작성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 건강하시고 다음 여행에서 좋은 상품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