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 복건성 <무이산 구곡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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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02.13 |
작성자 | 서*도 |
상품/지역 | 문화역사탐방아시아 |
무이산은 주자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朱子(1130-1200) 본명 熹 복건성에서 나서 주돈이, 정호, 정이 등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유교 철학인 성리학을 집대성하였으며, 1179년에는 백록동서원을 일으켜 서원교육의 시범을 보였다.
주자학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고려 제25대 충렬왕(1236~1308) 때 안향(安珦)에 의해서이다 주자학을 공부한 이들은 정도전을 중심으로 조선개국의 주역이 되어 주자학을 새로운 시대의 이념으로 내세운다 그후 이황과 이이 때에 최고의 전성시대를 이루며 각각 `동방의 주부자(朱夫子)`와 `동방의 성인`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주자학은 파가 갈리며 주리설의 영남학파와 주기설의 기호학파가 생겨난다
조선 후기 들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이 맞다고 주장하며 파벌이 형성되고 지나친 형식과 명분, 체면에 집착하는 부작용이 생긴다 우암 송시열은 "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다만 우리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렇듯 주자학은 조선 500년을 지배한 사상, 문화, 생활의 이념이었다
주자는 1183년 53세에 무이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며 무이정사 주변의 누정(樓亭) 과 지형을 시로 읊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지었고 1184년에는 무이계(武夷溪)의 구곡 경치를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를 방에 걸어놓고 무이산의 경치를 상상하고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읊으면서 주자의 학문을 흠모했다 이이는 황해도 해주의 석담천에 고산구곡을 설정하고 무이산 은병봉에서 이름을 딴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고, 이황은 도산서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며 무이구곡가의 운을 빌어 `차무이도가(次武夷櫂歌)`를 지었다 송시열은 괴산의 화양계곡에 은거하며 화양구곡이라 이름하였다
17세기 들어 조선에서는 `구곡문화`라고 이름붙일 만한 유행과 함께 전국에 150여개의 구곡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였고 때로는 12곡의 변형된 형태도 생겨났다 전국의 유명산과 계곡마다 구곡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지리산만도 세 곳이 남아있으니 남원의 구룡계곡(용호구곡), 산청의 구곡산 아래 무이구곡, 함양 엄천강의 화산12곡이다
구곡계죽벌마두 대나무 뗏목을 죽벌(주파이)로 부른다
오늘 일정은 조선의 유생들이 무이구곡도를 보며 상상 속에서만 그렸던 무이산 구곡계를 뗏목을 타고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과연 구곡계가 어떠했기에 조선 오백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유생들에게 절대적 흠모의 대상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보는 시간이다
대나무 뗏목 부두 전경
뗏목은 2명의 사공이 한 조가 되어 모는데 뗏목당 6명의 승객이 탈 수 있다 구곡계 9.5 km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약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고 당연히 상류의 9곡부터 시작하여 하류의 1곡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반면 주자의 무이도가는 정반대로 물길을 거슬러 1곡부터 시작하여 상류의 9곡 방향으로 올라가며 읊었다
내가 물길을 거슬러 오를 정도로 삿대를 저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한 모터보트를 탈 만큼 수심이 깊지 않은 곳도 더러 있어 주자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구곡계를 둘러볼 수밖에 없다 비록 중화사상과는 거리가 먼 사고를 가졌을만정 오늘 하루만은 마음으로나마 8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주자의 시절로 돌아가 무이도가가 대체 어떤 내용인지 조금이나마 알아보려 한다
사공은 장대를 삿대로 이용하여 물길 바닥을 눌러 방향을 잡거나 진행 속도를 조절한다 사공이야 삿대를 젓느라 땀이 날 지경이지만 흐리고 빗발이 듣는 날씨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한기마저 느껴진다
뗏목을 타고 이동하는 9.5km 구간 중에 나의 주된 촛점은 주자가 말한 구곡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각자 찾기이다 4년 전 지리산 구룡계곡의 각자를 찾으며 각자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이라면 몇번이고 다시 찾으러 올 수 있지만 여기는 그럴 수 없는 곳이고 더구나 사공이 중국인이니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아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무이도가(武夷棹歌)는 총 10수로 무이산의 경치를 읊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학문의 경지에 비유하여 점진적 완성의 단계를 설명한 것이다 서시는 이러하다
武夷山中有仙靈 무이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고 山下寒流曲曲淸 산 아래 푸른 시내 굽이굽이 맑도다 欲識箇中奇絶處 그 안의 기이한 절경 알고자 한다면 櫂歌閑聽兩三聲 뱃노래 두어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소
九曲將窮眼豁然 구곡에 다달으니 눈앞이 확 트이고 桑麻雨露見平川 싱그러운 뽕나무 밭 평천이 나타나네 漁郞更覓桃源路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도원 가는길을 찾지만 除是人間別有天 이곳 말고 별천지가 어디 있으랴
八曲風煙勢欲開 팔곡이라 안개 속 산세는 트여가고 鼓樓巖下水濚? 고루암 아래로 물줄기 감아도네 莫言此處無佳景 이곳에 절경 없다고 말하지 마소 自是遊人不上來 여기까지 와 보지 않아서라네
쌍유봉(雙乳峰) 젖가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七曲移船上碧灘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 오르며 隱屛仙掌更回看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네 却燐昨夜峰頭雨 어여뻐라 지난밤 봉우리에 비내리더니 添得飛泉幾道寒 나는듯한 물줄기 몇줄기
六曲蒼屛繞碧灣 육곡의 푸른 병풍바위는 시퍼런 물굽이에 둘러 있는데 茅茨終日掩柴關 띠집은 종일토록 사립문이 닫혀있네 客來倚棹巖花落 나그네 노 멈추니 바위에 꽃이 떨어지는데 猿鳥不驚春意閑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쇄포암 위 반산정
향성암(響聲癌), 쇄포암의 맞은 편에 있다 공곡전성(空谷傳聲), 텅빈 골짜기가 소리를 전한다는 의미이다
공곡전성 좌측 바로 아래 주자가 쓴 `서자여사(逝者如斯)` 글귀가 있는데 찍지 못했다 서자여사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물의 흐름에서 진리를 말한 것인데 공자가 어느 날 냇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보며 `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도 않는다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쇄포암(좌), 은병봉(우)
五曲山高雲深處 오곡은 산 높고, 구름이 깊네 長時烟雨暗平林 는개가 늘 끼여 평림은 어둑하고 林間有客無人識 숲 속의 늙은이 알아주는 이 없으니 ?乃聲中萬古心 어여라! 뱃노래에 만고 수심이 서려있네
모든 각자에 붉은 페인트 칠을 해놓아 오랜 세월의 고색을 느낄 수 없는 게 좀 아쉽다 하지만 만약 페인트 칠을 해놓지 않았더라면 나처럼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이 뗏목을 타고 지나치며 각자를 알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이런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四曲東西兩石巖 사곡이라 동서에 두 봉우리 우뚝한데 巖花垂露碧監毛 參毛 바위틈 꽃잎 이슬 푸른 물에 번져가네 金鷄叫罷無人見 금계 울음 그치니 본 사람이 없고 月滿空山水滿潭 빈산에 달빛 가득, 와룡담엔 물이 그득
대장봉(大藏峰) 사곡의 바위산으로 도가(道家)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숨겨둔 곳이라 한다 그 아래는 와룡담으로 무이구곡에서 수심이 가장 깊다
금계동, 대장봉 아래에 위치하였는데 새벽을 알리는 금닭이 있었다고 한다
홍교판(虹橋板) 홍교판은 배 모양의 목관인 가학선관(架壑船棺)을 절벽에 올려놓기 위해 사용된 받침대이다 3800년 전 상(商)나라 시절 이곳 복건성 원주민이었던 월족(越族)은 매장할 때 죽은 사람을 절벽에 매달거나 높은 암굴에 놓아 풍장(風蔣)을 하였다고 한다
가학선관(참고사진)
三曲君看架壑船 삼곡에서 가학선(架壑船)을 보았는가 不知停棹幾何年 노 젓기를 멈춘 지 몇 해이던고? 桑田海水今如許 상전이 벽해되어 지금처럼 변했으니 泡沫風燈敢自憐 물거품같고 바람 앞 등불같은 내 인생이여
二曲亭亭玉女峰 이곡이라 우뚝하니 솟아있는 옥녀봉 揷花臨水爲誰容 꽃을 꽂고 물가에서 누굴 위해 꾸몄는가? 道人不作陽臺夢 도인은 남녀의 기쁜 만남을 꿈꾸지 않지만 興入前山翠幾重 앞산에 스민 흥취 푸르름이 몇 겹인가
옥녀봉, 313m 전설에 의하면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었다. 하늘에 살던 옥녀는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우연히 대왕(大王)과 알게되어 서로 사랑을 하여 자식을 낳고 인간세상에 살았다. 이를 본 철판도인(鐵板道人)이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고하자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철판도인에게 옥녀를 잡아오도록 했다. 옥녀는 대왕과 같이 인간세상에 살고자하여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철판도인은 마법을 써서 옥녀와 대왕을 돌로 만들어 계곡의 양쪽에 두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과 대왕봉 사이에는 철판장(鐵板?)이란 병풍바위가 있는데 철판도인이 대왕봉과 옥녀봉이 만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관세음보살이 대왕과 옥녀를 불쌍히 여겨 옥녀봉 맞은편에 면경대(面鏡臺)를 두어 서로 얼굴을 비춰보게 하였다고 한다
경대(面鏡臺)
면경대와 옥녀봉
옥녀봉과 철판봉
1곡으로 접근해가면 서서히 대왕봉이 보인다 즉 옥녀봉은 2곡, 대왕봉은 1곡에 위치하였고 그 사이에 철판봉이 있다
대왕봉
一曲溪邊上釣船 일곡이라 시냇가에 낚싯배를 띄우니 ?亭峰影醮晴川 만정봉 그림자가 맑은 내에 잠겨있네 虹橋一斷無消息 무지개다리 끊어지자 소식조차 없고 萬壑千巖鎖翠烟 골짝 바위마다 푸른 안개 자욱하네
하선 부두
무이궁(武吏宮), 무이산에서 가장 오래된 도교의 궁전으로 역대 제왕들이 무이군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도교가 유행한 것은 당, 송 시대인데 무이궁은 당나라 742~755년에 건립되었다
송대 거리
대홍포경구(大紅袍景區)
무이산은 중국 오룡차의 발원지인데 대홍포는 중국 10대 명차에 속한다 매표소에서 약 20분 정도 걸어들어간 곳에 대홍포 모수(母樹)가 있어 이를 보러 간다 대홍포 모수는 총 6그루로 2003년 중국인민보험공사를 통해 1억 위안(한화 180억원)의 보험가입과 함께 보호 중인데 6그루에서의 생산량은 극히 미약해 2005년 제12회 상해국제차문화제에서 20g이 19.8만 위안(한화 3500만원)에 낙찰되었을 정도로 고가여서 일반인은 감히 맛볼 수조차 없다
" 무이산에 와서 대홍포 모수를 안 보면 평생 유감으로 남고, 대홍포 모수를 보고나면 유감이 평생간다 " 라는 말이 있다 무이산까지 갔는데 그 유명한 대홍포 모수를 못보면 그건 유감스런 일이다 막상 대홍포 모수를 보게되면 바로 눈 앞에 있는데도 그 차를 마셔보지 못해 유감이 남는다는 말이다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이 모수 대홍포 4량(200g)을 선물했는데 닉슨 대통령이 " 어떻게 이렇게 적은 양의 차를 선물하느냐 "고 주은래 총리에게 묻자 주은래는 1년 생산량이 400g인데 그 절반인 200g을 선물한 것을 두고 " 모택동 주석은 이미 당신에게 국토의 절반을 선물한 것이다 "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매표소에서 약 20분 정도 걷는 거리에 대홍포 모수가 있다
용의 형상을 한 9개의 암봉이 둘러싼 구룡과(九龍?)로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암운(巖韻) 무이산의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는 차이기에 암차이다 바위를 타고 내린 빗물로 인해 광물질이 풍부하다고 한다
대홍포 모수 앞 풍경
대홍포 모수, 석축 안에 4그루, 우측으로 2그루가 보인다 수령 350년
대홍포(大紅袍)는 봄에 찻잎이 돋아날 때 찻잎이 불꽃처럼 붉고 아름다워 마치 붉은 포를 쓰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옛날 과거 시험을 치러 가던 한 과객이 이곳을 지나다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주민이 대홍포 모수를 달인 물을 과객에게 마시게 했고 다행이 병이 나아 무사히 과거 시험을 치러 장원 급제까지 하였다 황제는 장원 급제한 그에게 황제의 홍포를 씌워주었는데 과객은 귀가길에 이 나무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황제에게서 받은 홍포를 씌워 주었다는 내용이다
주변의 차나무는 모두 모수를 무성번식시킨 것이다 줄기에 낀 이끼가 수령이 오래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수렴동경구(水?洞景?)
수렴동(水?洞), 절벽 상단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발을 드린 것 같다고 하여 수렴동이라 한다 겨울철 갈수기라서 수량이 적은 탓에 명색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우기에 오면 장관을 연출할 것 같다 안내판에 水?洞(Water Curtain Cave)로 적혀있어 전형적 동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체적으로 움푹 들어간 100m 높이의 병풍바위 형태로 윗부분이 비스듬히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폭포의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을 목룡담(沐龍潭)이라 한다
삼현사(三賢祠) 유자휘, 주자, 유보의 삼현을 모신 사당이다 유자휘는 주자의 스승이고 유보는 유자휘의 장자이다
百世如見, 주자가 쓴 스승을 `영원히 뵙는 듯하다`는 의미
목룡담
`서유기(西遊記)`의 작가인 오승은(吳承恩)은 이 동굴에서 영감을 받아 이곳을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무이산을 겨우 이틀 보고 무이산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틀만의 소감을 간략히 말해보면 무이산의 자연미는 그동안 내가 돌아다니며 보아온 세계 여러 곳의 다양한 경관과 비교할 때 그렇게 빼아나지 못하다 그런데도 무이산이 자연과 문화의 양방면에서 유네스코 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주자의 유학, 도교, 불교 등이 어우러진 높은 인문적 문화가치가 통합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주자의 무이도가 및 주자학이 과연 조선의 오백 년을 지배할 이념이 될만큼 가치가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세월이 흐르며 사조도 변했기에 현재의 내가 과거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조선의 지식층이 보다 실제적인 학문에 집중했더라면 조선이 보다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이산 2일차를 대홍포차를 맛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샤먼으로 돌아간다 한국에 최강 한파가 몰아치는 이날 중국 하북성에 많은 눈이 내린 관계로 북경남역을 출발한 고속철이 2시간 이상 늦어져 무이산역에 도착했다 샤먼 호텔은 밤 12시 경이 되어서야 들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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